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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올바름'을 넘어 '정치한 적 없음'까지 뻗친 문명 7 지도자 선정

문명/게임 정보

by Lucill 2025. 1. 21.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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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문명7의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현대 시대 플레이가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전작과 달라진 철도역 시스템과 승리 방식, 기술 트리 등이 공개되었는데 엉뚱하게도 다른 부분에서 상당한 논란과 파장이 일었다. 현대 스트리밍에서 벤자민 프랭클린과 함께 공개된 또다른 미국 출신의 지도자 '해리엇 터브먼'이 그 원인이었다.

 

 문명 7은 문명 변경 시스템, 지도자와 문명을 별개로 선택하는 시스템, 시대가 3개밖에 나뉘어지지 않는다는 점 등 기존 시리즈들을 즐겨왔던 유저들로써 너무 급진적이라고 느껴지는 변화들로 반감을 쌓아 왔지만 이번에 미국 지도자로 해리엇 터브먼이 선정됐다는 사실이 공개되면서 그런 불만이 폭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해리엇 터브먼은 사실 우리에게 친숙하지만은 않은 인물이지만 미국에서는 꽤 유명한 역사적 인물이라고 한다. 미국의 여성주의 및 흑인 인권운동가로, 노예 부모에게서 태어나 노예 해방 운동을 펼친 인물이다. 노예 해방을 위한 비밀결사 "지하철도"의 일원으로서 몇백 명 이상의 노예를 구출하고 때로는 군대를 이끌고 노예 해방에 나서기도 했다. 남북 전쟁에도 참여하여 노예 해방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24년에는 장군 계급으로 추서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인물의 위업과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저들은 해리엇 터브먼이 미국의 지도자로 선정된 것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표시했다. 해리엇 터브먼이 미국의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인인지는 차치하고, 이전 작들에서 워싱턴, 루즈벨트, 링컨 등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들이 등장했던 것과 비교하였을 때 "지도자 급으로 적절하냐" 라는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여기서 나아가 지금까지 많은 게이머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던 소위 '정치적 올바름'에 편승하여 단순히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지도자에 선정된 것이 아니냐는 비판까지 일었다. 이에 '정치적 올바름'을 지지하는 이들은 포럼에서 해리엇 터브먼의 지도자 선정을 비판하는 쪽을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비난하며 싸움으로 번지기에 이르렀다.

 

 사실 문명 시리즈가 '정치적 올바름' 논란에 휩싸인 건 처음이 아니다. 문명 시리즈는 심지어 초기작에서부터 대놓고 '정치적 올바름'을 표방했다고 무방할 정도의 행보를 보여 왔다. 이를테면 문명 2에서는 모든 문명별로 남/녀 지도자를 한 명씩 넣는 무리수를 두기도 했다. 때문에 미국 지도자로 루즈벨트 부인이 선정되기도 했다. 물론 역사적으로 여성 지도자의 수가 극히 제한되다 보니 전설 속 인물이나 여신이 등장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아예 가상의 인물을 지도자로 넣은 경우도 있었다. 그 이후 후속작들에서도 제작진이 지도자의 남녀 성비를 맞추기 위해 지도자로 내세우기에 부적합한 여성 인물들을 자꾸 리더로 선출한다는 비판이 지속되어 왔다.

 

 물론 이번 지도자 선정에 대한 비판의 일부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됐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지만, 사람들의 반감을 사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정치한 적 없는' 인물이 지도자로 선정되었다는 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문명 변경 시스템 등 다른 큼직한 변경점들에 묻히긴 했지만 문명 7 제작진은 이미 지도자 선정 기준을 대폭 완화했다고 공언한 바 있다. 말 그대로 정치적으로 문명을 지도했던 인물들만 리더로 선정하는 게 아니라, 종교적으로 민중을 이끈 지도자나 역사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들도 지도자로 선정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첫 공개 때에도 공자와 벤자민 프랭클린이 공개된 바 있다. 나는 문명 변경 시스템보다도 이러한 지도자 선정의 변화가 과연 적절한 것인지에 더 의문을 가졌다. 이전 작들에서도 지도자의 정통성에 대한 논란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는데, 이번에는 아예 그런 논란에 불씨를 제공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문명 7에서 지도자로 공개된 인물 중에는 실제로 국가를 통치한 적 없는 인물들이 상당수 있다. 공자의 경우에는 아시아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유교의 지도자였다는 점, 벤자민 프랭클린은 과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미국 독립 선언에 참여한 건국의 아버지 (Founder's Fathers) 에도 속한다는 점을 감안하여 어찌어찌 큰 비판을 피해갔지만 이후 공개된 인물들 중에는<군주론>의 저자로 유명하지만 '외교관'일 뿐이었던 마키아벨리, 이란 출신으로 세계 일주를 한 '탐험가' 이븐 바투타, 프랑스의 '장군'이었던 라파예트 등 아예 군중을 이끈 적도 없어 지도자로 선정될 만한 자격이 있는지 의문을 갖게 하는 인물들이 다수 등장했다. 문명 7은 이러한 역사적 위인들을 등장시키기 위해 '위인 시스템'이 존재해 왔고 이 인물들 역시 충분히 위인으로써 등장시킬 수 있었다. 해리엇 터브먼 역시 이 목록에 포함된다. 해리엇 터브먼이 흑인 인권 운동가이자 군대를 이끈 적도 있다고 하지만, 미국을 전반적으로 이끄는 지도자였던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인권운동가가 지도자로 선정될 수 있다면 추후 DLC에서 한국 지도자로 유관순이 나오는 것 아니냐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의견도 나온다. 

 

 문명7의 지도자 선정은 '정치적 올바름'을 넘어 시리즈 최초로 '정치한 적 없음'으로 나아가고 있다. 사실 이러한 지도자 선정이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지 도덕적으로 옳은지 그른지 여부는 사실 부차적인 문제일 것이다. 진짜 문제는 대중들에게 문명 시리즈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지도자들이 대중적이지 않은 인물들로 채워지면 소비자로써는 당연히 냉담한 반응이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명 6에서 프랑스 지도자로 '카트린 데메디치'가 공개되었을 때 프랑스인도 아니고 국가원수였던 적도 없고 주요 위인도 아닌 인물이 지도자로 선정된 것에 대해 뜨거운 비난 여론이 일었던 기억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내에서는 두툰 만화 때문에 오히려 가장 인기 있는 지도자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이번 문명 7의 경우 이전 작들과 비교하더라도 화제성이 확연히 떨어진다는 불안감을 지울 수가 없다. 납득하기 어려운 지도자 선정은 자칫 아무리 훌륭한 게임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소비자가 외면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이번 사태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우려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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